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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중심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유중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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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실 작성일05-05-25 16:23 조회8,5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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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신문(2005년5월12일)에 게재된 유중원 변호사의 시론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형사사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공정한 절차를 통하여 신속·정확하게 범죄를 수사·기소하고 형을 집행함으로써, 국가 형벌권을 실현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안전한 생활을 확보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사절차에 있어서는 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보호를 위하여 적정절차의 보장과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 상호 배척해서는 안되고 적정절차의 보장 하에서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최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을 적극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극히 형식적으로 운용되어 왔던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실질화하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의 개정안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적 사항이 바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배제하고 그 동안 공판에서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었던 검사의 피고인신문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정안에 대하여 검찰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격렬히 반발하는 가운데 검찰과 사개추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긴박한 상황이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공판중심주의는 거의 형해화되어 그 기본적 취지가 사실상 몰각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전문법칙이 형해화되어 조서재판이 재판의 중심을 차지해 버렸고, 공판심리에 있어서의 직접주의와 구두주의는 한낱 장식물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모든 책임을 검찰이 뒤집어쓰고 있으니 검찰은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공판중심주의가 이렇게 껍데기만 남은 것은 누구보다 공판의 운용 주체인 법원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이 그런 식으로 공판을 운용한 결과인 것이다.

지금 사개추위가 내놓은 개정안에 의하면 과연 공판중심주의가 확실하게 실현되고 그래서 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완전한 환상이 아닐까. 즉 공판중심주의를 저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제도적 정비 없이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제한하고 검사의 피고인신문권을 제한한다고 하여 공판중심주의가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개추위의 개정안은 본말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다.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 후 또는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일을 그러한 제도적 정비에 대하여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불쑥 추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적 요소는 무엇인가. 공판중심주의란 형사재판에 있어서 모든 증거자료를 공판에 집중시켜 공판정에서 형성된 심증만을 토대로 하여 사안의 실체를 파악하여 심판하는 원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배심제·참심제 하에서는 불가결한 원칙이지만 그러한 제도를 채택하지 않는 경우에도 법원의 공정한 심판을 기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칙으로 인정되고 있다. 공판중심주의의 내용으로 공판절차 상 여러 기본원칙이 있다. 먼저 일반국민에게 심판의 방청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공개주의가 그것이고, 또 판결은 법률에 다른 규정이 없으면 구두변론에 의거하여야 한다는 구두변론주의도 공판중심주의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공판 외에서 작성된 조서가 법관의 심증형성에 실질적 기초로 된다면 참다운 공판중심주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공판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전문법칙을 직접주의와 결합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공판기일은 될 수 있는 대로 계속하여 이를 열고 심리의 중단에 의한 법관의 심증형성의 박약화를 방지하여야 한다는 계속심리주의도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려는 원칙이다. 한편 공판중심주의의 실현을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제도는 공소장일본주의이다. 그것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함에 있어서 공소장에다 사건에 관하여 법원의 예단이 생기게 할 수 있는 서류 기타 물건을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법관이 백지의 상태로 공판에 임하여 직접 공판에서 심증을 형성하도록 하는 원칙이다.

우리 현실에서 위와 같은 공판중심주의가 확실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형사 법관과 공판 관여 검사가 현재보다 5~10배 정도 증원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법칙과 직접주의를 관철하기 위하여 오직 공판절차에서 모든 증거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력 구조로는 어림없는 일인 것이다. 더욱이 공판중심주의를 위해서 공판은 가능한 한 연일(連日) 계속해서 개정하는 것이 원칙이고, 앞으로 우리나라에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한다면 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관과 검사의 증원은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형사법정의 대폭적인 증설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또 공판중심주의는 공판절차에서의 철저한 증거조사와 이에 따른 복잡한 절차로 말미암아 자칫 재판의 장기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행 형소법 상 수사기관의 구속기간은 경찰 10일, 검찰에서 최대 20일이고, 법원 구속기간은 1심에서는 수사기관 구속기간을 포함해 6개월, 2·3심은 각 4개월로 제한하고 있어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불구속재판 원칙의 확립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강력범죄나 고액의 뇌물사건 중 상당수가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되는 온정주의적인 재판 풍토에서 불구속만을 계속 확대할 경우 범죄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현재 국민의 법감정인 즉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가 구속 기소되지 않으면 편파수사로 간주하거나 수사·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며, 매스컴을 통하여 사회 문제가 된 사건은 관련자 전원이 구속되어야만 국민의 직성이 풀리는 등 구속의 징벌적 기능을 당연시하는 현실에서, 또 피고인의 법정 출석을 확실히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현실에서 불구속재판 원칙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뭐니뭐니해도 공판중심주의 하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선변호제도의 대폭 확충과 내실화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선변호인의 부실한 변론은 그 동안 수없이 지적되어 왔는바, 일반적으로 국선변호인이 사선변호인에 비하여 그 변론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사실은 일종의 공지의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국선변호인의 보수가 15만원 정도에 불과하고 피고인 접견이나 기록 복사비에 대한 실비보상도 되지 않는 열악한 실정에서 열과 성을 다한 국선변호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변호를 위한 국선변호인과 피고인 간 인적 신뢰관계가 정상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시당초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변호제도의 대폭 확충과 내실화 없는 공판중심주의는 사실 공허한 것이다.

이러한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갖춰있지 아니한 상황에서 오로지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증력을 배제하고 검사의 피고인신문권을 제한한다고 하여 공판중심주의와 형사재판의 내실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형사재판제도는 우리나라에 근대사법이 도입된 이래 근 1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것인데 개혁도 좋지만 이상에 치우쳐 졸속 개혁을 하면 결국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개추위는 검찰에서 완강히 반대하는 마당에 형소법 개정 논의를 더욱 공론화하고, 모의재판과 공청회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다음 추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무슨 일정에 얽매어 급히 추진할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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