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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검찰, 그리고 대통령(양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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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실 작성일05-05-25 16:22 조회7,8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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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5년 5월 12일)에 게재된 한양대학교 헌법학 양건 교수의 시론입니다

"일본은 왜 범죄율이 낮은가." 미국과 유럽의 형사정책 연구자들은 이 물음을 수수께끼처럼 붙들고 있다. 구미(歐美)의 모든 선진국가들은 한결같이 높은 범죄율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데 잘 사는 선진사회 가운데 유독 일본만은 예외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장기간 도리어 범죄율이 감소하는 현상을 보여 왔다. 왜 그런 것인가.
일본법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미국의 법학자 존 헤일리는 이 물음에 색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요약하면 이런 얘기다.
"일본의 형사 절차에는 공식적인 절차 외에 비공식적인 제2의 트랙이 있다. 이것은 구미에서 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것이다. 제2 트랙에서는 자백이 중시된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가 여부가 경찰·검찰·법원의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백과 참회의 태도를 보이면 법집행 당국의 관대한 조치가 뒤따른다. 경찰의 수사 단계에서 상당수가 아예 검찰에 송치되지 않는다. 검찰에서도 기소유예되거나 벌금 등의 약식절차로 끝난다. 재판단계에서도 집행유예되거나 형량을 줄여준다. 이런 제2 트랙의 출발점은 자백이다.
자백과 뉘우침에 뒤따르는 관대한 조치, 이런 일본적 패턴이 바로 범죄율 감소에 기여한다. 법집행 당국의 처분이 무겁고 처벌이 강할수록 재범률(再犯率)은 높게 나타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범죄인들은 마음의 고통을 덜기 위해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를 촉발하면 재범률이 줄게 된다.
아울러, 자백과 참회를 이끌어내면 엄중한 응징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가 누그러지고 이에 따라 관대한 처분과 효율적 교정(矯正)이 가능하게 된다. 넘쳐나는 감옥과 높은 범죄율에 시달리는 구미 사회는 일본에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권력 없는 권위' 6장)
한국 역시 일본처럼 범죄율이 낮은 나라로 꼽힌다. 일본 형사 절차의 제2 트랙과 유사한 형사 관행도 갖고 있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형사소송법 개정 논의에서 이런 측면들이 얼마나 고려되는지 의문이다.
'자백 조서'에 의존하는 종래의 제도와 관행에 문제가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검찰의 주장대로 자칫 '고(高)비용 저(低)효율'제도를 급조하는 잘못은 피해야 할 것이다.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위험이 있다. 사물의 한쪽만 들여다보고 성급한 성취욕에 빠진다는 점이다.
지금 검찰은 형사소송법 개정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난제에 휩싸여 있다.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 공직부패수사처 신설 등 모두 검찰 수사권의 축소나 약화를 가져올 엄청난 도전들이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검찰의 '제도상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하다면 그 합리적 조정은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심각한 것은 특히 공수처 신설 문제다. 공수처 신설안이 지닌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 정치적 중립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지금의 검찰은 정치적 중립성의 면에서 어떠한가.
지난 2년간처럼 검찰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아온 적이 언제 있었던가. 검찰 수뇌가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기강 문란'이라는 경고까지 들어가며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것은 검찰 초유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리어 고위공직자 부패 수사에서 검찰의 힘을 빼고, 그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스러운 공수처 설치를 고집한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검찰 누르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근거 없는 것인가.
모처럼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게 된 절반 이상의 공(功)은 대통령에게 돌려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최대의 업적은 그의 재임 시에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최대의 업적을 이제 스스로 허물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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